본문 바로가기

AI SUNO 노래와 단편소설

[단편 소설&음악] 시간 정지

폐부 깊숙이 들이찬 공기에서 비 냄새가 났다. 옥상 난간의 거친 시멘트 감촉이 운동화 밑창을 타고 전해져 왔다. 잿빛 구름이 하늘을 짓누르고 있었고, 내 긴 머리카락은 미친년 널뛰듯 제멋대로 얼굴을 때렸다.

발끝을 허공으로 밀었다.

추락은 찰나였다. 아니, 찰나여야 했다. 위장이 쏠리고 심장이 목구멍까지 치솟는 부유감이 덮쳐오던 순간, 세상이 딸깍, 하고 멈췄다.

"자세 좋은데. 다이빙 선수 해도 되겠어."

낯선 목소리에 눈을 떴다. 나는 거꾸로 처박히는 자세 그대로 허공에 박제되어 있었다. 중력을 잃은 머리카락이 해파리 촉수처럼 내 머리 주변에 후광을 만들고 있었다. 내 곁에는 교복 셔츠를 입은 한 소년이 허공을 밟고 서서, 마치 미술관 전시품을 감상하듯 나를 뜯어보고 있었다.

"누구야, 너."

입술이 잘 떨어지지 않았다. 소년은 내 질문을 씹고는 내 주변에 둥둥 떠 있는 종이 쪼가리 하나를 검지로 톡 건드렸다. 옥상에서 함께 휩쓸려 내려온 수학 시험지였다.

"이런 상황에서 자기소개가 중요해? 지금 네 꼴이 얼마나 웃긴지나 봐. 뒤집힌 거북이 같아."
"안 웃겨. 이거 풀어. 당장."
"싫은데? 내가 왜?"

소년이 킬킬거렸다. 그는 턱짓으로 발아래를 가리켰다.

"저거 봐. 장관이지 않아?"

억지로 고개를 돌려 아래를 봤다. 사거리는 거대한 장난감 도시 같았다. 횡단보도를 건너던 사람들은 한 발을 든 채 굳어 있었고, 자동차가 내뿜던 붉은 미등은 긴 꼬리를 남긴 채 얼음 속에 갇혀 있었다. 세상의 모든 소음이 진공청소기로 빨아들인 듯 사라진, 차갑고 푸른 정적.

"다들 바쁘게도 사는구만. 여기서 보니까 그냥 개미 떼 같은데."


소년이 내 옆으로 둥실 다가와 쪼그리고 앉았다. 공기가 물처럼 출렁였다.

"그래서, 죽으면 편해질 줄 알았어?"
"상관없잖아. 내 인생이야."
"인생이라..."

그가 손가락을 튕겼다. 지직거리는 소리와 함께 내 눈앞 허공에 빛 무리가 피어올랐다. 홀로그램처럼 일렁이는 영상 속에는 꼬마 여자아이 하나가 있었다. 햇살이 쏟아지는 공원, 그네를 타며 자지러지게 웃는 아이.

"기억나? 저 날 아이스크림 먹다가 옷에 흘려서 엄마한테 혼났잖아. 그래도 좋다고 웃었지."
"치워."
"이건 어때?"

그가 손을 휘젓자 장면이 바뀌었다. 해 질 녘 교실. 주황색 노을이 책상 하나를 길게 비추고 있었다. 엎드려 있는 소녀의 등 위로 먼지만이 부유했다.

"아무도 말을 걸지 않던 날들이었지. 먼지 냄새, 칠판 지우개 터는 소리, 그리고 네 숨소리만 있던 시간."
"그만하라고 했지!"

소리를 지르려 했지만, 목소리는 젖은 솜처럼 무겁게 가라앉았다. 눈앞이 뜨거워졌다. 뺨을 타고 흐르던 눈물 한 방울이 턱 끝에서 떨어져 나갔다. 하지만 바닥으로 떨어지지 않았다. 내 눈앞 10센티미터 거리에, 수정 구슬처럼 맺혀 둥둥 떠 있었다.


소년이 그 눈물방울을 신기한 보석처럼 들여다보며 말했다.

"이거 봐. 도시의 불빛이 다 들어있네."
"비키라고... 제발."
"이 눈물, 슬퍼서 흘린 거야? 아니면 억울해서? 그것도 아니면..."

그는 짓궃은 미소를 거두고, 차가운 눈으로 나를, 아니 내 눈물방울에 비친 내 얼굴을 빤히 응시했다.

"살고 싶다는 비명인가?"

나는 대답 대신 입술을 깨물었다. 비릿한 피 맛이 났다. 멈춰버린 시간 속에서, 내 심장 소리만이 고막을 찢을 듯 쿵쿵거리고 있었다.


"살고 싶다는 비명이라니."

내 입에서 바람 빠지는 소리가 픽 새어 나왔다. 대답 대신 무릎을 끌어안았다. 허공에 둥둥 뜬 채 몸을 웅크리자, 어머니의 자궁 속에 든 태아처럼 작아진 기분이 들었다.

챙그랑.

어디선가 유리가 깨지는 환청이 들렸다. 아니, 환청이 아니었다. 내 몸 주변으로 날카로운 유리 파편들이 폭발하듯 흩어지며 정지해 있었다.

"이건 또 뭐냐? 전시회 컨셉이 너무 우울한데."

소년이 파편 하나를 툭 쳤다. 그 투명한 조각 안에는 아빠가 술병을 집어 던지던 밤이 재생되고 있었다. 바로 옆 조각에는 방문을 잠그고 숨죽여 울던 내 등이, 또 다른 조각에는 빨간 소나기가 내린 성적표를 구기던 손이 박제되어 있었다.

"보지 마."
"네가 보여주고 있는 거야. 네 머릿속이 이따위 파편들로 꽉 차 있으니까."

소년은 킬킬대며 파편 사이를 곡예 하듯 통과했다. 나는 지친 눈으로 그를 좇다 말고, 고개를 돌렸다. 시야 끄트머리에 하얀 점 하나가 걸렸다.

비둘기였다.


힘차게 날개를 펄럭이던 찰나에 시간이 멈춰, 녀석은 우스꽝스러운 조각상처럼 공중에 박혀 있었다. 잿빛 깃털 하나하나의 결이 선명했다. 나는 홀린 듯 손을 뻗었다. 닿을 수 있을까. 저 녀석의 심장은 아직 따뜻할까.

내 손끝이 비둘기의 가슴 털에 닿기 직전, 소년이 내 손목을 잡지 않고 내 얼굴 앞에 쑥 들이밀었다.

"이봐, 집중 안 해? 지금 네 인생의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기 직전이라고."
"......따뜻해 보여서."
"뭐?"
"그냥, 살아있는 건 다 따뜻하니까."

내 중얼거림에 소년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그는 잡고 있던 내 손을 놓았다.

"재미없네. 이제 슬슬 지겨워지는데."

그가 하품하듯 입을 벌리자, 세상의 색채가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붉던 신호등도, 파랗던 하늘도, 잿빛 도로도 전부 흑백으로 변해버렸다. 오직 나를 노려보는 소년의 눈동자와, 허공을 응시하는 내 두 눈만이 색을 가지고 있었다.

지직. 지이익.

귓가에 낡은 라디오 주파수 맞추는 소리가 들렸다. 배경에 깔린 고층 빌딩 숲 위로 '정지(停止)'라는 글자가 노이즈처럼 스쳐 지나갔다. 나는 이제 완전히 수평으로 누워, 텅 빈 흑백의 하늘을 보고 있었다.

"이제 결정해. 다시 재생 버튼을 누를까, 아니면 이대로 필름을 태워버릴까."

소년이 내 이마 위로 손가락을 가져다 댔다. 그의 손가락 끝에서 차가운 냉기가 흘러나왔다. 나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기이한 일이었다.

그토록 시끄럽던 파편들의 비명도, 심장을 옥죄던 불안도 사라졌다. 눈꺼풀 안쪽으로 부드러운 어둠이 내려앉았다. 날카롭게 나를 찌르던 도시의 직선들이 뭉개지고, 솜사탕 같은 하얀 빛이 번져왔다.

"......그냥, 쉴래."

내 입술이 달싹였다. 소년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아주 짧고 명쾌한 소리가 들려왔다.

딱.

손가락 튕기는 소리와 함께 세상이 뒤집혔다.

"헉!"

막혔던 숨이 터지며 멈췄던 시간이 폭포수처럼 쏟아져 내렸다. 정적은 깨졌고, 고막을 찢는 바람 소리가 귀를 때렸다. 흑백이었던 세상에 총천연색이 물감처럼 번졌다. 머리카락이 거꾸로 치솟고, 교복 치마가 미친 듯이 펄럭였다.

추락이다.

건물 외벽의 유리창들이 빠른 속도로 위로 솟구쳤다. 아니, 내가 아래로 처박히고 있었다. 속도감이 온몸의 살가죽을 벗겨낼 듯 사나웠다.

'아.'

바닥이 다가왔다. 아스팔트의 거친 입자가 현미경으로 보듯 선명해지는 순간, 나는 눈을 질끈 감는 대신 부릅떴다.

쿵, 하는 충격은 없었다.

내 몸이 바닥에 닿기 0.1초 전, 세상은 암전되는 대신 눈이 멀어버릴 듯한 하얀 빛으로 폭발했다. 내 그림자가 빛 속에 먹물처럼 번져 사라졌다.


그 하얀 허공 위로, 비둘기 깃털 몇 개만이 눈송이처럼 고요히 흩날리고 있었다.

 

https://suno.com/s/8YY9hNoZtdYRLpxl

 

시간 정지

Listen and make your own on Suno.

suno.com

https://youtu.be/sn5ie-p8auo